나는 시한부였다.
의사는 아주 조심스럽게, 하지만 너무 익숙한 태도로 말했다.
“여섯 달 정도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 목소리는 이상했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았다.
그저 이 말을 오늘만 한 게 아니란 듯… 수없이 반복했을 사람의 목소리.

나는 잠깐 고개를 숙였다.
종이에 적힌 숫자들을 멍하니 보았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 의사의 얼굴을 봤다.

“... 그 정도면, 봄은 넘기겠네요.”

의사는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아마도요.”

나는 그 말에 조금 웃었다.
봄은 넘길 수 있다니.
참 이상하게도, 그게 위안처럼 느껴졌다.
봄은… 늘 조금 늦게 왔으니까.

병원을 나서던 날, 나는 버스를 타지 않았다.
그냥 천천히, 걸었다.
신호등이 깜빡이는 횡단보도에 서 있으니 세상이 다 내 옆을 지나가는 것 같았다.

주머니 속에서 진단서가 접히는 소리가 났다.
그 속엔 온갖 숫자들이 적혀 있었다.
혈액검사 수치, CT 결과, 의사 이름, 그리고 작게 적힌 ‘예상 생존 기간’.

나는 다시 꺼내보지 않았다.
굳이 볼 필요가 없었다.
그 시간은 이미 내 몸 어디선가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는 걸… 내가 더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날 밤, 불을 끄고 누웠다.
어두운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크게 울지도 않았다.
그저, 눈가에 고여 있던 물이 중력에 이끌려 흘러내린 것 같았다.
나는 손등으로 물기를 닦았다.

‘아직은 괜찮아.’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조금 뒤에, ‘근데… 괜찮다는 건 뭘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몸은 아직 크게 아프지 않았다.
숨도 잘 쉬어졌다.
커피 맛도 괜찮았고, 낮의 바람도 좋았다.
그런데… 머릿속 어딘가가 서서히 얼어붙는 것 같았다.
내가 아직 다 느끼고 있는 게 맞나…?
가끔은 나조차 모르겠다.

다음 날 아침, 평소보다 오래 자고 일어났다.
햇살이 방 안 가득 들어와 있었다.

나는 커튼을 열었다.
작은 먼지들이 빛 속에서 조용히 떠 있었다.
한참 바라봤다.
정말 예뻤다.
아무 소리도 없었다.
그 조용함이 오히려 모든 걸 다 채우는 것 같았다.

나는 가끔 짧은 일기를 썼다.
“오늘은 커피가 맛있었다.”
“햇빛이 들어왔는데 따스했다.”
“걷는데 숨이 차지 않았다.”

별거 아니었다.
아무 의미도 없을 수 있는 기록들.
그런데 나는 알고 있다.
저 문장들이, 내가 하루를 살았다는 증거라는 걸.

언젠가는 멈출 것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 문장은, 과연 어떤 말이 될까.

나는 동네 공원을 걸었다.
조용했다.
평일 낮이라 그런지 사람도 거의 없었다.
벤치에 앉아 햇빛을 받았다.

눈을 감았다.
마치 이곳이 세계의 끝 같았다.
조금만 더 가면 경계가 나올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걸 넘으면 더 이상은 아프지 않을 것 같은 느낌.

그런데 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아직은 이쪽에 있고 싶었다.
아직은 이 공원의 나무 냄새를 맡고 싶었다.

집에 돌아와 씻고, 평소처럼 저녁을 준비했다.
식탁에 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준비하고 있는데,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 아직 밥을 먹고 있구나.’

그 생각이 어쩐지 눈물이 나게 했다.
죽음은 늘 멀리 있을 줄 알았는데 이제는 그 그림자가 식탁 위까지 와 있었다.

그래도 숟가락을 놓지 않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씹었다.
그건… 사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밤이 되면, 죽음이 더 가까워졌다.
낮에는 커피 냄새나 바람 소리 같은 것들이 나를 잠시 속여줬는데 밤은 다르다.

불을 끄면 몸속 어딘가에서 ‘시간’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심장이 뛰는 걸 느꼈다.
그 박동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의 박자처럼 느껴졌다.

나는 가끔 거울을 봤다.
거기엔 아직 내 얼굴이 있었다.
눈이 있고, 코가 있고, 입이 있었다.
숨이 쉬어졌다.

“괜찮아.”

나는 거울 속 나에게 말했다.
그러자 거울 속의 내가, 조금 웃은 것 같았다.
아마 착각일 거다.
그래도… 그 착각이 좋았다.

내 방 책상 위엔 늘 펜과 수첩이 그대로였다.
이 방은 아직 ‘살고 있는 사람의 방’이었다.

나는 언젠가 이 방이 정리될 거란 걸 안다.
누군가 들어와 이 책상 위를 깨끗이 치울 것이다.
그때 이 펜은, 수첩은, 담요는 어디로 가게 될까.

조금 쓸쓸했다.
그래서 더 꼭, 붙들고 앉았다.

어느 날 밤, 나는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아직은 아니야.
아직은… 조금 더, 여기 있고 싶어.”

그 소리는 너무 작아서, 나조차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은 충분했다.

나는 시한부였다.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오늘은 나는 커피를 내렸고, 산책을 했고, 책을 조금 읽었다.
그리고 방 안에 바람을 들였다.

그게… 오늘 하루였다.

아직 오지 않은 날.
그날이 오기 전까지, 나는 이렇게 살고 싶다.

나는 결국 병원에 입원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다.
가능한 한 집에 있고 싶었다.
내 방, 내 책상, 내 커튼, 냄비에서 끓는 물소리 같은 것들이… 아직 좋았다.
그 모든 게, 내 삶이 아직 여기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는데 몸이 너무 무거웠다.
숨이 깊숙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제야 깨달았다.
아… 이제 진짜 가까워졌구나…

병원은 이상하게 밝았다.
하얗고, 깨끗하고, 불필요하게 친절했다.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동안, 간호사들은 매일 내 팔에 주사 바늘을 꽂았다.
바늘이 들어올 때도, 링거가 천천히 내려올 때도… 나는 그저 가만히 있었다.

병실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에 잎이 돋았다가, 며칠 뒤엔 더 푸르러졌다.
그 속도가… 내 안에서 줄어드는 것들과 묘하게 맞물렸다.
나는 매일 조금씩 힘이 빠졌고, 반대로 나무는 조금씩 더 진해졌다.
나만 거꾸로 가는 것 같았다.

밤에는 더 자주 깼다.
낮에는 사람들이 있어서, 뭐라도 조금은 잊을 수 있었는데 밤엔 숨소리만 들렸다.
내 숨, 옆 병실 사람의 숨, 복도를 지나가는 간호사의 발소리.

그런데도 묘하게 두려움이 덜했다.
나는 그저 오래된 생각을 하나하나 꺼내보았다.
햇빛이 예뻤던 날, 친구랑 라면을 먹었던 날, 엄마가 웃으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던 순간.

그 모든 게 다시는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괜찮았다.

어느 날 새벽에는, 문득 창문을 열고 싶어졌다.
창문 가까이 가서 숨을 들이마셨다.
차가운 공기가 폐 끝까지 닿았다.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아직은… 조금 더 있고 싶어.”

그 말이 너무 작아서, 내 귀에조차 잘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러다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되었다.
앉아 있는 시간도 줄었다.
하루 종일 누워 있었다.

간호사가 창문을 조금 열어줬다.
하얀 커튼이 살짝 흔들렸다.
그걸 보며 나는 생각했다.
‘저 커튼은 언제까지 저렇게 바람에 흔들릴까.’

그리고 나 없는 방에서, 언젠가 또 누군가가 저 커튼을 보겠지.

마지막 날은 느껴졌다.
이제 숨을 더 들이마시기 힘들었다.
가슴 안쪽이 텅 비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조금은 무서워…
그래도 괜찮아…
조금 더… 조금만 더…”

내 속이 뻥 뚫린 듯이 가벼워졌다.
그러다 숨이 멈췄다.

그리고 나는, 아주 이상한 장면을 보았다.

나는 더 이상 병실에 있지 않았다.
그곳은 햇빛이 가득했고, 바람이 부드러웠다.
풀밭 위에 조그맣게 나를 묻은 흙더미가 있었고, 그 위에, 흰나비 하나가 살포시 앉아 있었다.

그 나비가 날아올랐다.
부드럽게, 천천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아, 내가 흰나비구나…

나는 잠깐 그 무덤 위에 앉았다.
살았던 흔적 위에서, 아주 잠깐, 다시 머물렀다.

그리고 바람이 불자, 나는 조금 더 높이, 조금 더 멀리 날아갔다.

그게 나의 끝이었다.
그러면서도… 어딘가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 같았다.


당신이라면,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 주어진다면 무엇을 하시겠나요?
아니, 오늘도 사실 그렇게 귀한 날인데,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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