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로 했다.
이 문장을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는지 모르겠다.
막상 입 밖으로 꺼내면 괜히 과장처럼 들릴까 봐, 아니면 아직도 미련이 남은 사람처럼 보일까 봐 항상 속으로만 삼켜버리곤 했다.
그래도 이제는 꺼내는 게 맞는 것 같다.
그 사람들에게.
돈을 빌리고 아무렇지 않게 날짜를 미루는 사람에게.
약속은 가볍게 말하면서, 기다림은 늘 내 몫이던 사람들에게.
아빠에게.
가족들의 안부를 나에게 묻던 아빠에게.
정작 나의 안부는 묻지 않던 아빠에게.
아빠를 챙기는 건 내 몫이라는 듯 말하던 할머니에게.
무조건 양보하라던 어른들에게.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호의를 권리처럼 여기던 사람들에게.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줄 알던 사람들에게.
그냥 죽으라던 사람들에게.
나를 도구처럼 바라보던 사람들에게.
필요할 때만 찾고, 필요 없으면 밀어내던 사람들에게.
나의 모든 것을 부정하던 사람들에게.
내가 애써 쌓아 올린 것들을 쉽게 무너뜨리던 사람들에게.
희생과 양보를 당연하게 여기던 사람들에게.
이름을 부르듯 적어 내려가다 보니, 그동안 내가 얼마나 많은 상황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는지, 얼마나 오래 같은 자리에서 맴돌았는지 알 것 같다.
나는 왜 그들에게 상처 받아야 했을까.
왜 누군가의 기분이 내 하루의 기준이 되었을까.
그들의 말 한마디에 하루가 무너지고, 그들의 표정 하나에 내가 잘못한 사람처럼 작아져야 했을까.
나는 왜 그들을 피해서 도망쳤던 걸까.
정면으로 부딪히면 더 크게 다칠 것 같아서였을까.
아니면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힐까봐 그랬던 걸까.
그리고 왜, 그렇게 도망치면서도 완전히 놓지는 못했던 걸까.
나는 왜 그들을 계속 붙들고 있었던 걸까.
이미 여러 번 실망했으면서도.
이미 여러 번 같은 장면을 반복했으면서도.
어차피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들의 말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왜 포기를 못했던 걸까.
어쩌면 그들에게 희망을 바랬던 것 아니었을까.
가족이니까, 오래 알던 사이니까.
언젠가는 달라질 거라고.
언젠가는 내 마음을 알아줄 거라고.
내가 겪은 시간을 조금은 이해해 줄 거라고.
한 번쯤은, 나를 사람으로 봐줄 거라고.
가족을 위해 나를 포기해야 했던 날들을.
그게 당연한 일처럼 여겨졌던 순간들을.
서운함을 말하면 예민해지고, 힘들다고 하면 유난이 되는 분위기 속에서 나를 접어두던 시간들을.
나를 죽여야만 했던 날들을.
내가 하고 싶은 말 대신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골라내던 밤들을.
속이 쓰려도 웃어 넘기고, 억울해도 내가 먼저 사과하던 습관을.
그게 어른스러운 일이라고, 그게 착한 사람의 태도라고 믿으려고 했던 시간들을.
그렇게 해야만 관계가 유지된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래야 버려지지 않을 것 같았고, 그래야 혼자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조금씩 나를 줄여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조금쯤은 사라져도 괜찮다고.
하지만 그렇게 줄어든 나는 어디까지고 내 생각이고, 어디까지가 남의 기대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묻는 질문에도 잠시 멈칫하게 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멈춰야 할 것 같다.
언제까지고 과거에 머물 수는 없으니까.
이미 지나간 말과 표정을 붙잡고, 그 안에서 이유를 찾는 일도 이제는 그만해야 할 것 같다.
언제까지고 안고 살아갈 수는 없으니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무게에는 한계가 있다는 걸, 이제는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모든 걸 이해하려는 태도가 반드시 옳은 건 아니라는 것도.
때로는 이해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 있다는 것도.
언제까지고 상처를 받으며 나 자신을 갉아먹어서는 안되니까.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이유로, 나를 지워가면서까지 남아 있을 필요는 없으니까.
누군가의 편안함을 위해, 내가 계속 불편해질 필요는 없으니까.
누군가의 기대를 채우기 위해, 내가 계속 비워질 필요는 없으니까.
이젠 그들을 포기해야 될 때가 온 것 같다.
나는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로 했다.
이 말이 완벽하게 지켜질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적어두면, 적어도 나에게는 약속이 될 것 같아서.
조금 늦었지만, 이제라도 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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