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음악을 시작했을 때, 그는 겨우 아홉 살이었다.
낡은 업라이트 피아노 앞에 앉아 첫 건반을 눌렀던 그날, 그 소리는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그건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세상과 연결되는 문이었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어디에서도 서툴기만 했던 그는 피아노 앞에서만큼은 말없이도 감정을 전달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말했다.
“넌 음악 할 때 정말 다르다.”
“표정이 완전히 바뀌어.”
그는 그 말들이 기뻤다.
‘내가 어딘가에서, 뭔가를 잘하고 있구나.’
그건 존재의 증명이었고, 숨 쉴 공간이었다.

그렇게 그는 음악을 자신의 언어로 삼았다.

그러나 어떤 언어든, 침묵은 찾아온다.
그에게도 그것은 갑작스럽지 않게, 아주 천천히 스며들었다.
처음엔 손끝이 무거웠고, 다음엔 악보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어느 날은 건반을 누르고도 소리가 울리지 않았다.
건반은 정직했고, 소리는 여전했지만, 그에게만 그것이 점점 멀어져 갔다.

“왜 이렇게 느려졌지?”
“집중이 안 돼.”
“예전엔 이렇게 불안하지 않았는데.”

공연 전날, 그는 밤새 손가락을 풀며 자신에게 말했지만, 말은 말로만 끝났다.
소리는 살아 있었지만, 음악은 사라지고 있었다.

그의 방은 작았다.
피아노와 간이 책상, 좁은 침대 하나.
그는 그 방 안에서 수없이 멜로디를 만들었고, 부쉈고, 다시 세웠다.
멜로디는 그의 일기였고, 시간이었다.
한 곡, 한 소절, 한 마디가 그의 삶을 설명해 주는 유일한 문장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그 방에서 아무것도 쓰이지 않았다.
건반 위 손가락은 멈췄고, 음표는 이어지지 않았다.
머릿속은 텅 비었고, 감정은 굳었다.
그는 매일 그 방에 앉아 있었지만,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 방은 점점 무음의 공간이 되었다.

사람들은 몰랐다.
그가 음악을 멈춘 이유를.
“번아웃 아니야?”
“좀 쉬면 다시 괜찮아질 거야.”
“다들 그런 시기 한 번쯤 겪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말들은 전혀 닿지 않았다.
그의 침묵은 단순한 권태나 피로가 아니었다.
그건 ‘자신의 언어를 잃는 일’이었다.
음악은 단지 취미가 아니라 정체성이었고, 이제는 그 정체성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는 한밤중에 자주 깼다.
악보의 빈 여백처럼 깨어 있는 새벽.
그때마다 그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건반 위에 손을 얹고, 조용히, 아주 조용히 눌러봤다.

소리는 여전했다.
하지만 그 소리는 그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그는 말했다.
“예전엔 이 소리가 나를 울렸는데.”
“왜 지금은 아무 감정도 없지?”

그건 마치, 오랫동안 친했던 친구가 어느 날 낯설어진 기분.
같은 말을 하는데,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
음악은 여전히 음악이었지만, 그는 음악을 읽지 못했다.

과거의 영상들을 다시 보게 된 건 우연이었다.
공연 영상, 오디션 리허설, 친구들과의 즉흥 연주.
거기엔 환하게 웃으며 건반을 치는 자신이 있었다.
눈빛은 뜨겁고, 손끝은 자신감에 차 있었고, 무대 위 그의 몸은 음악 그 자체였다.

그는 그 화면 속 자신에게 속삭였다.
“그때 넌… 진짜였구나.”
그리고 한참을 침묵했다.
“나는, 어디까지 와버린 걸까.”

우울은 소리 없이 찾아왔다.
처음엔 멜로디가 떠오르지 않는 것으로 시작했고, 그다음은 악보를 보려 하지 않게 되었고, 결국은 피아노 뚜껑을 닫아버렸다.

그는 그 상태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음악을 하지 않는 음악가라는 말이 너무 무서웠고, 그것이 곧 ‘자기부정’처럼 느껴졌다.

한 친구는 물었다.
“요즘엔 무슨 곡 써?”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쉬고 있어.”
사실은, 멈춘 지 오래였다.

어느 날, 그는 오래된 하드디스크를 꺼냈다.
그 안에는 자신이 만든 곡들이 수십 개 들어 있었다.
제목 없는 파일들, 미완의 멜로디, 녹음된 한 줄의 피아노 테마.

그는 조용히 그중 하나를 눌렀다.
스피커에서 희미하게 퍼지는 그 소리.
그건 한때의 그 자신이었다.
숨죽인 듯 조심스럽게 시작했다가, 후반으로 갈수록 자신감 있게 풀리는 구조.

그는 눈을 감고 들었다.
들으면서, 그 곡을 만들던 날을 떠올렸다.
비 오는 오후, 커피 향, 두꺼운 수첩, 손등에 묻은 펜 자국.
그 작은 것들이, 그 곡을 탄생시킨 기억들이, 조용히 되살아났다.
그는 그날 밤,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다.
악보를 펴지도 않고, 손가락을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그 앞에 앉아 있었다.
그건 일종의 기도였다.
음악이, 자신을 다시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다시 음악을 시작할 수 있을까?”
그는 그 질문을 자신에게 수없이 던졌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이렇게도 생각했다.
‘음악은 떠난 게 아니라, 내가 멀어진 것일지도 몰라.’

그는 천천히 다시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이번엔 아무런 기대도, 억지도 없이.
그냥 눌러봤다.
도.
단 하나의 음.
그건 완벽하지 않았고, 아무 감동도 없었지만, 그 소리는 ‘시작’처럼 들렸다.

그리고 그 순간, 아주 희미하게, 방 안에 공기가 달라졌다.
오랫동안 침묵하던 그 방이, 조금은 ‘살아있는 공간’처럼 느껴졌다.

그는 아직 음악을 완전히 되찾지 못했다.
건반 위에서 자유롭지도 않고, 감정을 멜로디로 옮기는 일은 여전히 두렵다.
하지만 그는 안다.
자신이 음악을 버린 게 아니라, 음악이 자신을 버린 것도 아니라는 걸.

음악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는 다시 그 방에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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