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조용한 방 같았다.
오래 닫혀 있던 문을 열면, 미세한 먼지들이 천천히 흘러나왔다.
빛이 거의 들지 않는 그 방 안에는 오래된 상자들이 놓여 있고, 그 상자들 위엔 누군가 적어놓은 날짜와 한 줄의 메모가 붙어 있다.
“이 날, 너는 울었어.”
“이 날, 누구도 네 말을 듣지 않았어.”
“이 날, 네가 사라지고 싶다고 처음 생각했어.”
그는 그 방을 매일 마주했다.
원하지 않아도, 그 문은 저절로 열렸고, 상자들은 손에 쥐어졌다.
기억은 잊힌 게 아니었다.
단지, 계속 그를 따라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기억은 무작위였다.
지나가던 거리의 냄새 하나, 엘리베이터 안의 벽지 무늬, 어떤 특정한 노래의 멜로디, 우연히 마주친 문장의 어조— 그 모든 것이 단추가 되어 오래된 기억의 문을 열었다.
그 문 너머엔 늘 비슷한 장면이 있었다.
초등학교 운동장, 혼자 앉아 있던 낮의 햇빛.
중학교 교실, 자신을 보고 웃던 친구들의 입 모양.
고등학교 복도, 무심하게 지나간 어깨.
그리고 집 안, 너무 조용한 거실의 정적.
그 모든 장면은 실제보다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기억은 이상하게도, 고통스러운 것일수록 색을 잃지 않았다.
기쁘고 따뜻했던 기억들은 흐릿해지고 사라졌지만, 상처받은 순간들은 더 또렷해졌고, 때로는 과장되기까지 했다.
그는 혼잣말로 말했다.
“기억은 왜 이렇게 잔인할까.”
그는 가끔 꿈을 꿨다.
기억 속 한 장면이 반복되는 꿈이었다.
학교 계단을 오르던 날, 누군가 뒤에서 밀었던 그 순간.
몸이 앞으로 기우뚱 넘어지면서, 무릎이 깨지고 피가 났고, 그 위에서 친구들이 웃었던 장면.
그는 그 꿈에서 늘 같은 대사를 들었다.
“장난이었어, 진짜 그럴 줄 몰랐지.”
“야, 그냥 넘어간 거 가지고 왜 그래.”
“울어? 그 정도로?”
그는 꿈속에서도 말하지 못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설명할 수 없었고, 누가 자신의 편이 되어줄지도 몰랐다.
그는 눈을 뜨며 속삭였다.
“지나간 일이야, 그건 오래전 일이야.”
하지만 그 말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지나간 일은, 사라진 일이 아니었다.
기억 속의 그 장면은, 여전히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한 번도, 그 모든 걸 제대로 말해본 적이 없었다.
상처를 입은 순간마다, 그는 침묵을 선택했다.
“괜찮아.”
“나 때문일지도 몰라.”
“참아야지.”
그 문장들은 보호막이었지만 동시에 가면이었다.
그리고 그 가면을 너무 오래 쓰다 보니, 이제는 진짜 얼굴이 무엇이었는지도 헷갈렸다.
기억은 거울이었다.
그 안에 비친 자신은 어릴 적의 모습이었고, 눈동자에 깊은 두려움이 맺혀 있었다.
그 두려움은 여전히 어른이 된 자신 안에 남아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책장 구석에서 오래된 사진첩을 발견했다.
거기엔 어릴 적 웃고 있는 얼굴이 있었다.
해맑게, 아무 걱정 없이, 두 손을 활짝 들고 웃고 있는 자신.
그는 그 얼굴을 오래 들여다봤다.
그리고 묻고 싶었다.
“그때 너는 진짜로 행복했니?”
“아니면, 그 웃음도 누군가를 위한 거였니?”
기억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웃고 있는 얼굴은 그에게 어떤 감정을 전달하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아직 남아 있어.’
그는 그 감정을 느꼈다.
그 감정은 잊히지 않은 기억이 아니라,
지워지지 않는 존재의 흔적이었다.
기억 속에는 고요한 폭력이 숨어 있다.
아무도 때리지 않았고, 아무도 상처를 내지 않았지만, 그는 분명히 다쳤다.
외부의 말과 행동보다 더 아픈 것은, 그 순간 느껴졌던 ‘무시당함’이었다.
그는 기억 속에서 늘 작아졌다.
말을 삼켰고, 눈을 피했고, 몸을 움츠렸다.
지금도 누군가 목소리를 높이면,
그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찔했다.
그건 몸에 새겨진 기억이었다.
잊는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기억은 몸으로 남았다.
하지만 그에겐 단 하나, 다른 기억도 있었다.
누군가 자신에게 조용히 말을 건네던 순간.
“괜찮아. 나는 네 말, 다 듣고 있어.”
그 말은 아주 짧았지만,
그는 그 말 한마디로 수많은 날을 버틸 수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왜 그 말 하나가 그렇게 오래 남은 걸까?’
그건 그 말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이 너무 조용했던 그 시절, 누군가의 ‘말’은 빛처럼 들렸다.
그는 그 기억을 꺼내어 품었다.
고통의 기억들 사이에, 하나의 온기가 있다는 것.
그 온기만으로도, 자신은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
기억은 어쩌면 방이 아니라, 숲일지도 몰랐다.
어딘가는 가시가 있고, 어딘가는 햇살이 있다.
길을 잃기도 하고, 되돌아가기도 하지만, 계속 걸어가다 보면 문득, 바람이 불고 낙엽이 흔들리고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그는 기억의 숲 안에서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지만, 그 숲을 통과하면서 조금씩 자신을 다시 만나고 있었다.
길은 없지만, 방향은 있었다.
숲은 여전히 깊고 어둡지만, 그 속에는 혼자만의 길이 있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