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매일 밤 11시 52분에 편지를 쓴다.
이유는 없었다.
그저 그 시간이 되면, 마음 안쪽 어디선가 말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낮 동안에는 조용했고, 웃지도 울지도 않았다.
하지만 해가 완전히 지고, 방 안이 숨죽이듯 조용해진 그때쯤이면 그의 마음도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살아있다는 감각이, 그때쯤 조금 들었달까.
편지를 쓰기 시작한 건 열세 살 무렵부터였다.
처음에는 보내기 위한 편지였다.
아주 오랜만에, 아주 조심스럽게 적은 첫 번째 편지는 떠난 아버지를 향한 것이었다.
하지만 끝내 부치지 못했다.
주소를 몰랐고, 솔직히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종이를 접어 서랍에 넣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아무 말도 없었고, 아무 일도 없었다.
그 다음 날 밤, 또 한 장의 편지를 썼다.
이번엔 누구를 향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조용히, 마음에 남은 말을 종이에 옮긴 것이었다.
“나 요즘 자주 멍해져. 속이 텅 빈 것 같아.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기억 안 나.
아무도 내가 뭘 느끼는지 모르는 것 같아.”
그 편지도 서랍 속으로 들어갔다.
셋째 날, 넷째 날. 그렇게 편지는 하나씩 늘어났다.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그 시간을 기다리게 되었다.
하루 중 유일하게 마음을 꺼낼 수 있는 시간.
소년의 일상은 조용했다.
학교에서는 말이 적었고, 고개를 숙이는 일이 더 많았다.
몇몇 선생님들은 그에게 말을 걸었고, 상담을 권했다.
소년은 고개를 저으며 “괜찮아요.”라고 말했다.
그 말에는 아무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
정말 괜찮아서가 아니라, 그렇게 말하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집에서도 그는 혼자였다.
어머니는 늦게까지 일했고, 식탁 위에는 늘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아들, 잘 지내지? 엄마가 바빠서 미안해.
사랑해. 오늘도 밥 꼭 챙겨 먹고, 일기 써.”
소년은 그 메모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그냥 찢어버린 적도 있었다.
그리고 다시, 서랍에 넣어둔 첫 번째 편지를 꺼내 들었다.
‘이걸 엄마가 본다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
그는 알 수 없었다.
결국, 편지를 다시 서랍 속 깊숙이 넣었다.
그냥, 조용히 밀어 넣었다.
편지는 점점 쌓여갔다.
수십 장, 수백 장.
책상 서랍엔 더 이상 들어가지 않아 박스 하나에 담기 시작했다.
편지를 쓸 수록 마음이 가벼워지진 않았다.
그렇다고 더 무거워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 순간만큼은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루 동안 느꼈던 아주 사소한 감정들.
복도에서 친구가 눈길을 피한 일, 급식 줄에서 실수로 부딪혔는데 아무도 사과하지 않은 일, 체육시간에 혼자 앉아 있었던 일.
어떤 사람에겐 별일 아닐 수도 있는 그 일들이 소년에겐 아주 크고 무거운 감정이었다.
누군가 알아주지 않으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으면 정말 그런 일이 있었던 게 맞나, 자기 자신도 헷갈려졌다.
그래서 그는 적었다.
기억을 붙잡듯이, 감정을 꺼내듯이.
그는 증명하고 싶었다.
‘나는 존재했다’
‘나는 느꼈다’
‘나는 아팠다’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편지의 말투가 조금씩 달라졌다.
처음에는 ‘나는’으로 시작했던 문장들이 어느 날부터인가 ‘너는’으로 바뀌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진짜 말을 걸듯이.
“너는 지금 어디에 있어?
“혹시 너도 나처럼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어?”
“너는 아무 말 없이 사라지지 않을 거지?”
편지 상단에는 그저 ‘To.’라고만 적혀 있었다.
소년은 그 빈칸이 좋았다.
누구든 될 수 있었고, 아무도 아닐 수도 있었다.
어쩌면, 자기 자신일 수도 있었으니까.
어느 날, 그는 편지 한 박스를 들고 편의점 옆 낡은 붉은 우체통으로 향했다.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 녹슨 철제 우편함.
소년은 그곳에 조용히 편지를 넣었다.
이상한 행동이라는 걸 알면서도 묘하게 가벼웠다.
감정이 이제는, 자기 혼자만의 것이 아니게 된 것 같았다.
그날 이후로도, 그는 계속 편지를 썼다.
어떤 날은 그냥 ‘오늘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어’ 한 줄 뿐이었고, 어떤 날은 종이 두 장에 걸친 긴 이야기.
그 편지들은 이제 ‘그 누구도 모르는 누군가’를 향해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소년은 우체통을 열기 직전,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그 위에 편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봉하지도 않은 채, 바람에 약간 흔들리는 상태로.
그 안에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나도 네가 쓴 편지를 받았어.
그래서 답장해.
나도 매일 편지를 써.”
소년은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그저 장난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낙서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말엔 진짜 편지를 써 본 사람만이 아는 어떤 마음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소년은 천천히 입술을 깨물며, 편지를 접어 손에 꼭 쥐었다.
그리고 그날 밤,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마음으로 펜을 들었다.
“내가 쓴 걸 누가 봤다는 생각, 처음이었어.
이상하게, 눈물이 났어.
고마워, 진심으로.”
소년은 여전히 편지를 쓴다.
매일 밤 11시 52분.
그 습관은 아직 그대로다.
그런데 요즘은,
가끔 그 편지를 우체통에 넣을 ‘용기’를 낸다.
누가 보지 않더라고, 어딘가 또 다른 누군가가 자신처럼 글을 쓰고 있을지 모른다는 그 작고 약한 믿음 하나로.
소년은 그 믿음 하나로 오늘 하루를 버텨낸다.
그리고 그 믿음은, 그를 아주 조용하게, 다시 세상과 연결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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