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아.
아니, 그릴 수가 없어.
벽에 걸린 캔버스들은 전부 비어 있어.
말 그대로, 숨도 쉬지 못하는 백지.
물감도, 붓도, 초안도 없고.
그냥 하얘. 아무것도 없어.
세 달이 넘도록.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
아침이면 붓을 들고, 저녁이면 내려놓고.
계속 반복했는데, 한 번도 색을 입히지 못했어.
아니, 입히지 못하는 게 아니라 입힐 수 없었어.
손이 아니라, 마음이 멈췄으니까.
죽은 거지, 그냥.

물감은 다 굳어 있었고, 팔레트 위에는 먼지가 내려앉았고, 붓은 서랍 속에서 그냥 썩고 있었어.
가끔 열어봐도, 그건… 그냥 물건이었어.

근데 이상하게도, 그게 나쁘지 않았어.
그 침묵이, 그 공허가… 이상하리만치 편했어.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그 자리가, 그 자리에 내가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조금은, 덜 아팠달까.

예전의 나는 색으로 말하던 사람이었어.
누군가는 노래로, 누군가는 시로, 누군가는 몸짓으로 말했다면, 나는 언제나 색으로 나, 자신을 말했지.
내가 하고 싶은 말들, 내가 못했던 말들을 다 색으로 그렸어.
어떤 날은 노란색으로 웃었고, 어떤 날은 파란색으로 울었고, 어떤 날은 검정으로 숨었어.

근데 지금은… 아무 색도 못 꺼내겠어.
전부 다, 너무 선명해서…너무 선명해서, 너무 찔려서.
그 선명한 감정이, 나를 찢어놨어.
기쁨도, 슬픔도, 너무 진해서 아팠고, 그래서… 그냥 없어졌으면 했어.
색이라는 것 자체가.

무채색 안은 조용했거든.
그 회색 안에서는 나도 없고, 세상도 없고, 그냥… 아무도 나를 못 봤어.
그래서, 내가 이렇게 망가지고 있고, 무너지고 있다는 걸 아무도 몰랐어.

그날도 그랬어.
평소처럼 작업실 창문을 열었는데… 빛이 들어왔는데도, 색이 없었어.
회색이야. 전부 다. 모든 게.
하늘도, 빛도, 바람도, 내 손도, 내 몸도.
회색이었어.
말도 안 되는데, 말도 안 되는 거 아는데 진짜로 그랬어.

겁났어. 너무, 너무 무서웠어.
나는 살아있는데, 무채색으로 녹아드는 느낌.
사라지는 것 같았어.
어딘가로 꺼지는 기분.
그 감각이 얼마나 끔찍한 건지, 말로는 못 해.
차라리 소리 지르고 울고 불고 했으면 나았을까…?
그날부터 모든 게 이상해졌어.

처음엔 말하지 않았어.
며칠만 지나면 나아지겠지, 괜찮아지겠지. 그렇게 믿었으니까.
그래야만 했고.
근데… 그게 아니었어.
그 회색은 점점 더 짙어졌고, 내 안까지 파고들었고, 결국 나를 바닥까지 끌고 갔어.
너무 깊은데, 아무도 없었어.

어느 날 캔버스 앞에 섰는데 뭘 그리고 있었는지도 생각이 안 났어.
기억도, 감정도, 하나도 안 떠올랐어.
그냥… 텅.
무너졌지.
다 무너졌어.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고개를 숙이고, 아무것도 안 했어.
그냥 그렇게 있었어.
몸 안에 뭐가 빠져나가는 느낌.

그게 시작이었어.
무채색의 나날들.

사람들은 가끔 나에게 물어.
“요즘은 그림 안 그려요?”
“전시회 기다리고 있는데, 언제 하세요?”
“슬럼프겠죠, 누구나 한 번쯤은 겪는 거잖아요.”

슬럼프라니. 웃겨.
슬럼프는 다시 그릴 수 있는 사람들의 얘기잖아.
나는… 그리고 싶은 마음 자체가 없는데… 그게 어떻게 슬럼프야.
결핍이 아니라, 공백인데.
아예 없는 건데…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싶었어.
그냥 잊혀지고 싶었고, 아무도 나를 안 불렀으면 했고,
그냥 그랬어.

아침에 눈을 떠도 안 일어났고, 창밖도 안 봤고, 햇빛도, 계절도, 아무것도 몰랐고, 하루가 언제 시작되고 언제 끝났는지도 몰랐어.
방은 어두웠고, 불도 안 켰고, 나는 그림자처럼 붙어 있었지.

슬프지도 않았고, 기쁘지도 않았고,
아무것도 아니었어.
그냥… 없었어.
감정이라는 게… 있었나?
가끔 그런 생각만 했어.

그럼에도, 살아 있다는 게 제일 끔찍하고 괴로웠어.
몸은 멀쩡했거든. 심장은 뛰고 있었고, 시간은 계속 흘렀어.
그게 너무 싫었어.
왜 멈추지 못하는 거야?
왜 이렇게 텅 빈 채로 살아야 해?
나는 왜…

어느 날, 작업실 한가운데에 앉았어.
굴러다니는 물감, 굳은 팔레트, 서랍 속 붓들.
다 오래됐고, 다 말라 있었고, 다 멈춰있는데 나만… 나만 아직 살아 있더라.
왜 나만…

그래서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어.

“이게 끝이어도 괜찮아.”

며칠 뒤, 서랍을 뒤지다가 낡은 편지 하나를 꺼냈어.
어릴 적 선생님이 준 손편지였어.

“너는 색으로 말하는 아이야.
네가 말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네 마음을 느낄 수 있어.
그러니 그 손을 잃지 말고, 꼭 오래 간직하렴.
그 손이 네가 세상과 이어지는 실이니까.”

그 말이 지금 와서 무슨 소용이 있나 싶다가도
그래도… 잠깐은, 아주 잠깐은 울컥했어.

그래서… 예전에 칠하다 만 캔버스를 꺼냈어.
회색만 깔린, 오래된 그림.
서랍을 열고, 구석에 남아있는 물감 하나를 꺼냈어.
보라색. 아주 연하고, 조용한 보라색.
신기하게도 그건 말라 있지 않았어.
그냥… 나처럼 멈춰 있었던 거겠지.

처음엔 망설였어.
붓을 들었지만, 손이 떨렸어.
무서웠고, 겁이 많이 났어.
기억들과 감정이 쓰나미처럼 밀려왔고, 상처들은 다시 벗겨졌어.
너무 아팠는데 그래도, 한 번만, 다시 한 번만.
붓을 캔버스에 댔고 색이 번졌어.
희미했지만 보라색이었어.

그날 밤, 처음으로 창문을 열었어.
차가운 바람이 들어왔고, 방 안은 아주 천천히 숨을 쉬는 것 같았어.
하늘은 어두웠고, 별은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어딘가에서 누가 숨 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아니, 어쩌면 그게… 나였는지도 모르지.
나는 중얼거렸어.

“나… 아직 다 사라진 건 아니구나.”

눈물은 안 났어.
근데 뭔가가 아주 깊은 곳 어딘가에서 천천히 깨어나는 느낌이었어.

색은 아직 다 돌아오지 않았어.
그래도… 보라색 하나는 되찾았어.

그리고 다시, 나는 조심스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
매일은 아니야.
어떤 날은 그냥 멍하니 창밖만 봐.
어떤 날은 붓을 들었다가 그대로 내려놓기도 해.
그래도 예전처럼 완전히 멈추지는 않았어.

다음으로 돌아온 건 흑연빛이었어.
회색과 검정 사이.
무게감 있고, 묵직하고, 말 없는 색.
아직 내 안에 남아있는 우울 조각들이 그 색을 품고 있는 것 같아.
밝은 색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만… 괜찮아.

이제는 꼭 밝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아.
지금은… 이걸로도 충분해.
이렇게라도 다시 그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우울은 색을 빼앗아가지만, 색을 다시 찾아오는 일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스스로에게만 허락된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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