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에 대해서 묻는 질문 앞에서 늘 오래 고민하게 된다.
대단한 계기나 분명한 전환점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아서다.
어느 날 갑자기 무언가를 깨닫고 결심하듯 펜을 잡았던 것도 아니다.
다만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날들이 쌓여왔다는 느낌-
울 수 없던 날들이 있었다.
울면 무너질 것 같아서, 괜찮다고 말하면 스스로를 속이는 것 같아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앉아 있던 시간들.
그때 글은 무언가를 해결해 주지 않았다.
대신 옆에 있어줬다.
괜찮다고 말하지도 않았고, 울어도 된다고 등을 떠밀지도 않았다.
그냥 그 자리를 함께 지켜주는 방식으로.
사람은 자신이 느낀 걸 그대로 안고만 살아갈 수 없다는 걸 나는 일찍 알았다.
마음은 생각보다 자주 넘쳤고, 그 넘침은 소리 없이 사람을 망가뜨렸다.
눈에 띄는 사건이 없어도, 특별히 불행한 일이 없어도 감정은 스스로 무게를 만들어냈다.
특히 색이 많은 마음일수록 더 그랬다.
밖으로 꺼내지 않으면 스스로를 가려버린다.
감정 하나하나가 문제라기보다는 그것들이 겹치고 쌓이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아무것도 구분되지 않게 되는 상태.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기대와 실망, 버티고 싶은 마음과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한 덩어리가 되어 안쪽에서 눌러 앉혔다.
그래서 쓰기 시작했다.
정리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버티기 위해서였다.
잊지 않기 위해서였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걸 나 자신에게라도 남겨두고 싶어서였다.
음악과 멀어지게 된 일도 비슷했다.
음악이 먼저 나를 놓아버린 건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너무 멀리 가 있었을 뿐이었다.
잡으려고 하면 계속 손에서 미끄러지고, 좋아하는 마음이 사라지지는 않았는데 그 마음을 증명해야 하는 순간들만 자꾸 늘어났다.
사랑하는 데도 계속 설명해야 하는 관계처럼, 아끼는 데도 계속 결과를 보여줘야 하는 관계처럼 음악은 나를 조금씩 지치게 했다.
‘내가 부족한 걸까?’
‘재능이 없다는 말이 맞는 걸까?’
이 질문들은 답을 찾기 위해서라기보다 스스로를 의심하는 습관처럼 따라붙었다.
좋아하는 마음만으로는 버티기 어려운 순간들이 있었고, 그때마다 나는 나 자신을 조금씩 깎아내리고 있었다.
글은 달랐다.
글은 정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느려도 괜찮았고, 엉성해도 괜찮았고, 중간에 멈춰도 그대로 받아주었다.
사람이 아니라서 떠나지 않았고, 시간이 지나도 태도를 바꾸지 않았고, 잘했는지 못했는지를 굳이 묻지도 않았다.
그래서 붙잡았다.
살기 위해서, 버티기 위해서.
음악을 내려놓은 건 미워서아 아니었다.
상처받은 채로 계속 사랑하는 방법을 그때의 나는 몰랐다.
더 망가지지 않기 위해 거리를 두는 쪽을 택했을 뿐이다.
멜로디 대신 문장을, 음표 대신 여백을 택한 건 도망이라기보다 살아남는 쪽에 가까웠다.
솔직히 말하면 글이 좋아서라기보다는 놓으면 무너질 것 같아서였다.
글은 취미가 아니라 난간이었다.
붙잡지 않으면 아래로 떨어질 것 같은 밤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 밤들은 항상 극단적인 형태로 오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는 하루, 잘 버틴 것처럼 보이는 하루의 끝에서 문득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느낌.
그 공허함이 발목을 잡았다.
나는 스쳐 가는 감정을 그냥 보내는 걸 잘 못한다.
사라질 것 같은 장면 하나, 마음에 잠깐 스친 생각 하나를 붙잡아 두지 않으면 그 순간까지 함께 사라지는 것 같았다.
글은 그걸 막아주는 방식이었다.
‘이건 없던 일이 아니었어.’
이 문장을 나 자신에게 건네기 위한 방법.
아무도 읽지 않아도, 아무 반응이 없어도, 적어도 이 감정만큼은 분명히 존재했다고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게 해주는 증거.
사람에게 기대는 건 여전히 어렵다.
너무 조심스럽고, 내 무게가 상대에게 짐이 될까 봐 끝내 혼자 삼켜버리는 쪽이다.
기대가 생기는 순간부터 이미 상처받을 준비를 하게 되는 성격이라 차라리 혼자 버티는 쪽을 택해왔다.
글은 그런 나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의존이었다.
부담을 주지 않고, 버려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글은 떠나지 않는다.
오늘 아무 말도 못해도, 며칠 뒤 다시 돌아와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그 안정감은 사람에게서 배우기 어려웠던 것이었다.
왜 이렇게 느끼는지, 왜 쉽게 지치는지, 왜 낭만을 포기하지 못하는지.
글을 쓰는 동안 혼란은 문장이 되고, 문장은 잠시라도 질서를 얻는다.
완벽한 해답은 아니어도 ‘아, 내가 이래서 그렇구나’라는 이해 하나를 남기는.
그 이해가 내일을 살아가게 했다.
나는 확신보다는 질문에 가깝고, 완성보다는 남겨두는 쪽을 선택해왔다.
사라짐이 어떤 무게인지 이미 겪어보았기 때문에.
감정이 사라지고, 하루가 이유 없이 사라지는 걸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래서 글이 없으면 나 자신이 너무 쉽게 흩어질 걸 알고 있다.
쓰는 걸 멈추는 일은 습관 하나를 버리는 게 아니라 지나온 시간을 한꺼번에 부정하는 일처럼 느껴진다.
기다려주고, 중간에 멀어져도 다시 받아주고, 잘하지 않아도 떠나지 않는 것.
사람에게서 받기 어려웠던 안정감을 나는 글에서 배웠다.
언젠가는 글이 난간이 아니라 길이 되는 날이 오겠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대로 있어도 괜찮은 날도 분명히 오겠지.
하지만 지금은 괜찮아 보이는 얼굴 뒤에서도 무너지는 마음이 있다는 걸 알기에.
소리 내지 않아 되는 고백을 오늘도 문장으로 남긴다.
울지 않아도 되는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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