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 없던 하루를 떠올려 본다.
정확히 말하면, 떠올릴 게 없는 하루다.
기억에 남을 장면도, 오래 붙잡고 곱씹을 말도 없이 흘러간 날.
우리는 그런 날을 쉽게 정리한다.
‘그냥 평범한 하루였어.’ 그 말 속에는 대충이라는 숨김과 안도감이 함께 들어 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은 사실 이상한 말이다.
아무 일도 없었던 날은 거의 없다.
다만 기록할 만한 일이 없었을 뿐이다.

아침에 눈을 뜨고, 아직 덜 깬 몸으로 커튼을 젖히고,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하늘을 확인한다.
비가 오지 않는다는 사실, 바람이 생각보다 차갑지 않다는 사실, 몸이 어제보다 조금 덜 아프다는 사실.
그 모든 것이 오늘을 시작하게 만든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조건’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기본값처럼 여긴다.

당연하다는 말은 그래서 편하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감사하지 않아도 되고, 붙잡지 않아도 되니까.

숨을 쉴 때마다 감사하지 않듯이, 우리는 살아 있는 상태를 특별히 인식하지 않는다.
이런 상태가 오래 이어지면, 우리는 그것을 능력이라고 착각한다.
내가 잘 버티고 있다고, 내가 강해서 이 정도는 괜찮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냥 무너지지 않았을 뿐이다.
오늘이 아직 끝나지 않았을 뿐이다.

당연한 것들은 늘 눈에 띄지 않고, 요구하지 않고, 자신을 증명하려 들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들을 쉽게 잊는다.
잊는다는 말보다, 의식하지 않는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의식하지 않아도 괜찮은 상태, 그게 바로 당연함이니까.

사람도 그렇다.
매일 비슷한 시간에 연락이 오는 사람, 아무 말 없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곁에 있어주는 사람.

그 존재는 점점 소음이 아닌 배경이 된다.
고마운 마음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다만 표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
늘 거기 있을 것 같아서, 조금은 소홀해져도 괜찮을 것 같아서.
그 마음이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아주 안전한 착각이라는 건 알겠다.

그러다 어느 날, 그 당연함이 어긋난다.
답장이 늦어지고, 말투가 달라지고, 이유 없는 침묵이 생긴다.
그제야 우리는 마음을 더듬는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무슨 말을 놓쳤을까.
사실은 잘못된 게 아니라, 그냥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의 무게를 뒤늦게 느끼는 중일지도 모르는데.

당연한 것은 사라질 때보다, 흔들릴 때 더 아프다.
완전히 없어지기 전, ‘이전과 달라졌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그때 우리는 깨닫는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것 위에 기대어 있었는지를.

물 한 컵, 따뜻한 방, 오늘도 아무 사고 없이 돌아온 몸.
이 모든 것이 누군가에겐 간절한 바람일 수 있다는 걸, 우리는 대게 상상하지 않는다.
상상하지 않아도 괜찮은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 안정감은 축복에 가깝지만, 동시에 감각을 둔하게 만든다.

그러니 가끔은 일부러 멈춰 서야 한다.
하루가 무사히 끝났다는 사실 앞에서.

오늘도 큰일은 없었고, 대단한 성취도 없었고, 누군가를 극적으로 구하지도 못했지만, 그래도 하루를 살아냈다는 사실.
그 자체로 충분한 날이었다는 걸 인정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우리는 늘 더 잘해야 한다고, 더 특별해야 한다고 배워왔으니까.

하지만 삶의 대부분은 특별하지 않은 날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날들이 무너지지 않고 이어진다는 건, 꽤 큰 일이다.

당연한 것은 사실 연약하다.
우리가 관심을 주지 않아도 버티고 있을 뿐이지, 영원히 유지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렇다고 매 순간 감사 인사를 하며 살 수는 없지만, 가끔은 마음속으로라도 인정해 주고 싶다.

당연함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지 말자.
그건 삶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고, 나 자신에 대한 태도이기도 하니까.

아무 일 없던 하루를 아무렇지 않게 넘기지 말자.
그 하루가 있었기에, 내일이라는 말이 남아 있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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