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서랍을 열 때마다 늘 그 자리에 있는 물건이 하나 있다.
누가 이름을 불러주지도 않고, 특별히 새것처럼 반짝이지도 않지만, 늘 같은 자리에서 기다리는 존재.
한쪽 모서리가 닳아 비스듬해진 지우개.
무언가를 지우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정작 완벽하게 지우지는 못하는 물건.
진하게 눌러 쓴 글씨는, 아무리 힘을 줘도 종이 결 사이에 옅은 흔적을 남긴다.
그게 꼭 우리의 삶 같아서, 괜히 멈춰 서게 만든다.
살다 보면 지우고 싶은 순간이 많다.
한 번 던진 말, 너무 솔직해서 스스로 놀라버린 마음, 감당하지 못했던 감정들.
그런 순간마다 ‘없었던 일처럼’ 만들고 싶어 지우개를 찾게 되지만, 사실 우리 마음에는 그런 기능이 없다.
그저 시간이 다듬어줄 뿐이다.
지나간 일들이 뭉툭해지고, 아팠던 순간이 둥글어지고, 어느 순간엔 왜 그렇게까지 힘들었는지조차 흐려지기도 한다.
내가 예전에 쓴 글을 다시 읽다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의 나는 문장을 너무 세게 눌러 썼고, 마음을 숨기지 못한 채 종이에 들이부었다.
지금 보면 서툴고 투박하지만, 그 흔적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
그걸 지워버리면 그때의 나까지 함께 사라지는 것 같아서.
살아간다는 건 결국 적고, 지우고, 다시 쓰는 일의 반복 같다.
틀린 부분을 지우고 나면, 그 옆에 또 다른 문장을 적을 수 있다.
마음이 무너진 날도 마찬가지다.
오늘의 후회를 지우고 나면, 내일의 조그만 용기가 들어설 자리가 생긴다.
지우개를 쓰는 동작을 가만히 생각하면 재미있다.
지울 때는 손이 뒤로 밀려가는데, 다시 쓸 때는 앞으로 온다.
마치 한 발 뒤로 물러서는 것 같다가도, 결국엔 다시 앞으로 걸어가는 느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장’이라는 게 거창한 게 아니라, 이런 아주 작은 움직임 속에 숨어 있는 게 아닐까.
지우개는 시간이 지날수록 몸이 조금씩 작아진다.
가끔은 너무 작아져서 손끝으로 잡기도 힘들어지고, 결국 어느 날 문득 사라진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우리가 쓴 이야기까지 없어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지우개가 닳아 없어질 때까지 반복해온 모든 흔적이, 우리 삶의 결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어준다.
나는 지우개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지운 것보다, 지우고도 남아 있는 것들이 나를 만든다는 걸.
흔적이 남아도 괜찮고, 조금 어색해도 괜찮고, 예전의 내가 서툴렀어도 괜찮다는 걸.
그래서 나는 책상 위에 놓인 그 지우개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한 번쯤 틀려도, 조금 엉성해도 괜찮다고.
지워지는 만큼 비워지고, 비워진 만큼 다시 적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아직 ‘쓰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생각보다 꽤 큰 힘이 된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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