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의 차갑지만 생생한 숨결 속에서,
나는 매일 아침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낯설거나 두렵지 않았다.
익숙함을 넘어, 어딘가 깊은 편안함이 배어 있는 여정이었다.
나를 이끄는 건 오직 하나의 장소.
내 손길이 닿았고, 나의 땀과 숨,
그리고 꺼지지 않는 희망의 의지를 심어둔 그 특별한 곳이었다.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흐를수록
그곳으로 향하는 길은 더 이상 험하지 않았다.
한때 숨이 가빠오던 오르막도,
불편했던 굴곡도 점차 부드러워졌다.
그 길 위에는 이제,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고요한 평화와
작은 설렘이 스며들어 있었다.
발밑의 흙과 크고 작은 돌멩이의 감촉은
더 이상 날 멈추게 하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땅의 결,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의 일부가 되었을 뿐이었다.
섬의 바람 소리도 달라졌다.
차갑거나 날카롭지 않았다.
오히려 조용히 내게 말을 걸듯,
뺨을 스치고 지나가며
부드럽게 어루만졌고,
이따금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손길처럼
나를 격려하는 것만 같았다.
멀리서 들려오는 희미한 파도 소리,
바위틈과 나뭇가지 사이,
혹은 땅속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작은 생명들의 움직임.
그 모든 소리들은
더 이상 두려운 낯선 울림이 아니었다.
이제는
나의 하루를 채워주는
다정하고 평화로운 동행처럼 느껴졌다.
섬은 살아 있었고,
그 생명의 목소리 속에 나도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었다.
그 조용한 숨결의 일부가 되어,
섬과 함께,
자연스럽게 숨 쉬고 있었다.
내가 처음 만들어가기 시작했던 그 소박한 공간은
이제 더 이상 ‘작은’ 공간이라 부르기 어려울 만큼
크게 자라나 있었다.
눈에 띄게, 그리고 때로는 경이로울 정도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넓어졌고,
훨씬 더 푸르러졌으며,
생명으로 가득 찬, 활기가 넘치는 공간이었다.
예전엔 겨우 눈에 띄던 희미한 생명들이
이제는 땅 위로 힘차게 솟아올라 있었다.
강인한 줄기들은 제법 단단하고 곧게 뻗었고,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잎사귀는
이전보다 훨씬 선명하고 깊은 녹색을 띠고 있었다.
어떤 줄기 끝에서는
예상하지 못했던 색의 작고 예쁜 꽃봉오리들이
봉긋하게 피어났고,
또 다른 곳에서는
이름 모를 작은 열매들이 알알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 메마르고 척박했던 땅 위에서 자라난,
믿기 힘든 풍요의 모습이었다.
마치 내가 쏟아온 모든 정상과 시간이
섬의 끈질긴 생명력과 만나
조용한 기적을 이뤄낸 듯했다.
나는 매일 아침 그곳에 도착하면,
가슴 벅찬 마음으로
그들의 성장을 살폈다.
밤새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어떤 새로운 잎이 돋아났고,
어디에서 또 다른 꽃이 피었는지.
그 작은 변화 하나하나는
나에게 온 세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듯한 감동이었고,
존재의 근원을 채워주는 깊은 기쁨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흙을 어루만지며
여린 뿌리들이 더 넓게, 더 깊이
섬의 땅 속으로 뻗어갈 수 있도록
땅을 부드럽게 다듬었다.
섬 어딘가에서 길어온 사장 맑은 물을
손으로, 혹은 나뭇잎으로 만든
작은 그릇에 담아와,
단 한 줄기의 생명도 마르지 않도록
아끼듯이, 사랑하듯이 부어주었다.
성장을 방해하는 것들은
조심스럽게, 하지만 단호하게 뽑아냈다.
이 작은 정원이
건강하고 강한 생명으로만 가득하도록.
온전히, 살아 있도록.
돌봄의 시간은
내게 깊은 평화와 흔들림 없는 안정감을,
그리고 존재의 근원적인 충만함과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느껴지는 기쁨을 안겨주었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건강한 흙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
자라나는 생명들이
물을 머금으며 흡수하는 희미하지만 분명한 소리,
바람에 잎사귀가 부드럽게 흔들리는 평화로운 움직임,
그리고 그 존재들로부터 전해지는
뜨겁고 강렬한 생명의 기운.
이 모든 감각들은
내 안의 복잡하고 소란스러웠던 파도롤
조용히 잠재우며,
나를 이 순간, 이 공간 속에
온전히 존재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더 이상
노동이나 책임감의 형태로 주어진 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깊은숨을 내쉬며 영혼을 정화하는 시간처럼,
지금 이 순간에만 머무르며
나 자신과, 그리고
이 섬이라는 살아 있는 생명체와
조용히, 깊게, 조화롭게 이어지는
신성한 시간이었다.
나는 매일매일 깨달았다.
작은 생명을 돌보는 그 행위 자체가
곧 나 자신을 돌보고 치유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그들의 눈부신 성장이
곧 내 내면의 성장이라는 것을.
내 안 깊숙이 상처 입고,
기억 속에 묻혀 있던 어두운 부분들이
조금씩 아물어가고,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더 단단하고, 더 유연하게,
그리고 놀라운 아름다움으로 자라나고 있다는 것을.
작은 정원의 경계는
멈추지 않고 천천히, 꾸준히 확장되었다.
이전에 쌓았던 돌담 너머,
숲의 가장자리까지,
그리고 바다가 스치는 해변의 경계까지.
나는 거친 흙을 부드럽게 다듬고,
날카로운 돌멩이를 하나하나 치워가며
새로운 땅을 만들어 나갔다.
섬의 다른 곳,
바위틈이나 척박한 환경 속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아 있던
강한 생명력을 지닌 식물들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들을 조심스럽게,
뿌리째 뽑아와
나의 정원 한 켠에 새로운 구성원으로 심었다.
그 식물들은
다채로운 형태의 희망이 되어
내 공간에 뿌리를 내렸다.
하나하나의 식물을 심고 돌보는 시간이 쌓이면서,
이 작은 공간은 점점 더 풍요로워졌다.
그리고 점점 더,
나의 손길과 이야기로 채워지는 공간이 되어갔다.
내가 흘린 시간과 땀,
견뎌낸 아픔과 회복,
그리고 말없는 사랑이 스며든 공간.
내가 만들어가는, 살아 있는 세계.
나만의 과거와 미래가 담긴
숨 쉬는 공간.
나의 영혼이 기꺼이 머무르는 곳.
정원은 이제 더 이상
나 혼자만의 공간이 아니었다.
내가 정성껏 가꾼 푸르름과 생기,
그리고 고요하게 흐르는 평화의 기운에 이끌려
작은 동물들과 곤충들이 하나둘 찾아오기 시작했다.
알록달록한 나비들은 꽃 주변을 맴돌며 춤을 추었고,
작은 벌들은 윙윙거리며 달콤한 꿀을 모았다.
이름조차 모르는 귀여운 동물들이 풀숲 사이를 오가며
정원에 생기를 더해주었다.
어떤 날엔,
새들이 날아와
내가 나무 잔해들로 정성껏 만든 작은 의자 위에 내려앉아
고요하고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주기도 했다.
그들과의 조용한 교감은
내 안에 오랫동안 머물던 외로움을
조금씩, 아주 조금씩 덜어주었다.
나는 그들에게 말을 걸었고,
그들은 눈빛과 몸짓으로
이 섬의 이야기와,
살아 있는 세계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했다.
나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이 섬의 모든 생명들이
이제는 나의 가족이자 친구였다.
정원을 가꾸는 일상에 깊이 몰두하면서도,
섬의 다른 곳에 대한
알 수 없는, 그러나 분명한 이끌림이 마음 깊은 곳에서 피어올랐다.
특히 숲 안쪽, 가장 깊숙한 곳.
예전엔
극심한 두려움과 내면의 어둠이 뒤엉켜 있던 그곳이
이제는 마주해야 할 진실,
정리가 필요한 기억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조심스럽지만 단단한 마음으로
숲 안으로, 더 깊은 곳으로
다시 발을 들였다.
이전엔 나를 얼어붙게 만들고 도망치게 했던
기괴하게 뒤틀린 형상들이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들은 침묵하고 있었고,
그 모습은 변하지 않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들을 보는 순간
날카로운 공포보다는
깊은 먹먹함이 먼저 밀려왔다.
그들의 뒤틀린 몸짓 속에 새겨진
시간의 무게,
그리고 말없이 묻혀 있던 고통과 상처가 보였다.
마치 오래도록 아물지 않은
깊고 검붉은 형태처럼.
그들은 더 이상
섬뜩하거나 나를 공격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나는 그 형상들이
내 안의 깊고 숨겨진 상처를 투영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는
그 상처들을 이해하고 끌어안고
천천히 정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숲은 이제
두려움의 공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안의 아픔이 형상화된,
마주하고 치유해야 할 감정의 지형도였다.
나 자신의 내면이
이 숲의 풍경을 통해
천천히 말을 걸고 있었다.
숲 안쪽으로,
숨을 들이쉬며 더 깊숙이 걸어 들어갔다.
시간이 멈춘 듯한 그곳에서
나는 서서히
생명의 기운이 완전히 사라진 공간과 마주했다.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들,
껍질이 벗겨지고 속이 썩어 문드러진 형체들,
균열 가득한,
이름 모를 구조물들이
희미한 그늘 속에 뿌리처럼 박혀 있었다.
그것들은 살아 있지 않았다.
이미 오래전에 죽어버렸고,
지금은 오직 ‘남겨진 존재’로만 거기 있었다.
나는 문득,
그 형체들이
마치 내 과거의 실패,
끝내 회복하지 못한 관계,
잊고 싶었던 상처,
묻어둔 채 외면해 온 꿈들처럼 느껴졌다.
그들은 그 자리에 조용히 서 있었지만,
그 침묵은 무겁고 뼈아팠다.
섬의 오랜 상처,
그리고 나의 깊은 아픔을 증언하는 듯했다.
나는 다가갔다.
망설이지 않고.
생기 없는 형체의 곁에 무릎을 꿇고,
손바닥으로 차갑고 메마른 표면을 천천히 짚었다.
딱딱하고 거친 감촉.
손끝에 전해지는 깊은 균열의 흔적.
시간과 고통,
침묵과 외면에 의해 깎이고 조각난 표면이었다.
나는 아주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까지의 여정에서 얻은 모든 용기와 의지를,
작게 움튼 희망과 생명의 힘을
모두 끌어올려
내 안에서 단단히 쥐었다.
결심했다.
이곳을,
이 죽어버린 형체들을 정리하기로.
그건 단순히
버려진 구조물을 없애는 정비가 아니었다.
이것은 내 안의 죽어버린 부분들,
더 이상 자라날 수 없는 과거의 상처,
끝내 이해받지 못한 고통들을
인정하고, 마주하고,
그 뿌리째 뽑아내는
혹독하고 고통스러운 단절의 의식이었다.
날카로운 도구는 없었다.
오직 나의 몸.
나의 손,
나의 발,
그리고 나의 의지뿐.
나는 맨손으로,
맨발로,
온몸으로
생기 잃은 나무들과 맞섰다.
밀고,
끌고,
뽑아내고,
부러뜨렸다.
땅에 바위처럼 단단히 박힌 뿌리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건 마치
내 안에서 오랫동안 침잠해 있던
소리 없는 절망의 무게 같았다.
마른 가지들은 날카로워
살갗을 긁고,
옷을 찢었다.
손바닥엔 거친 껍질과 파편에 생채기가 나고
물집이 터졌다.
근육은 찢어질 듯 떨렸고
숨은 가쁘게 차올랐다.
땀은 비처럼 흘렀다.
그러나 나는 멈추지 않았다.
죽은 나무 하나를 뽑아낼 때마다
그건 단순한 육체의 고됨이 아니었다.
내 안의 깊은 흉터 하나를,
외면했던 기억 하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그 뿌리를 붙잡고
내 삶에서 뽑아내는 일이었다.
뽑아내는 순간,
땅이 흔들렸고
나의 내면도 동시에 흔들렸다.
그 고통은
거의 견딜 수 없을 만큼 깊고 날카로웠지만,
동시에
숨통이 트였다.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던 짐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벗겨지는 듯했다.
숨을 쉬는 것이
다시 가능하다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으로 느꼈다.
삶의 짓누르던
모든 무명(無名)의 슬픔과
버텨온 시간의 고통을
비로소 손으로 짚고,
정리하고,
떠나보내는 과정.
나는 이 과정을 통해
더 이상
그 고통의 형상들에 나를 내어주지 않기로,
그 무게에 짓눌리지 않기로 결심했다.
과거와의 단절.
그것은 고통스러웠지만,
그만큼 강하고,
그만큼 해방적이었다.
베어낸 생기 없는
나무들의 자리에는,
조용하고 깊은 공백이 남았다.
햇빛은 그 빈터 위로
스며들 듯 내려앉았고,
이전에는 숨어 있던 땅의 결이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드러났다.
처음으로 마주한 그 공간은
척박하고 거칠었지만,
이상하리만치
따뜻한 기운이 감돌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걷힌 자리에서,
분명 무언가가
시작될 수 있으리라는 예감.
그 감정은 아주 작고 조심스러운 것이었지만,
오래된 어둠 속에서
처음 피어나는 빛처럼
나를 멈춰 세웠다.
나는 그 땅 위에 천천히 손을 얹었다.
모래와 흙,
돌부리와 부서진 뿌리들의 감촉이
손바닥에 전해졌다.
그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의 오래된 상처들,
외면해 왔던 감정들,
과거의 실패,
지워지지 않는 후회,
끝내 닿지 못했던 진심과
내내 마음속에서만 맴돌던 말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이제 그것들은
더 이상 숨어 있지 않았다.
빛 아래 드러난 죽은 나무의 뿌리처럼,
아픔들의 실체는 또렷했고,
나는 그 형체를 부정하지 않고
바라볼 수 있었다.
그것들을 인정하는 순간,
그것들은 나를 짓누르는 짐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을 증명하는
무늬로 바뀌어갔다.
이곳은 비워낸 공간이 아니라,
다시 채워가기 위한 자리였다.
무언가를 심고,
돌보고,
가꾸어갈 수 있는
새로운 시작의 터전.
나는 알 수 있었다.
이것이 단순한
정리나 청소가
아니었다는 것을.
이것은 나의 내면을 정리하는 일이고,
다시 살아가기 위한 준비였고,
진짜 의미의 ‘기반 다지기’였다.
그간 견뎌온 시간들과
그 안에서 움튼 변화들,
새롭게 생긴 단단함이
나를 이 자리까지 이끌어왔다.
나는 더 이상 부서진 자신을
수습하는 존재가 아니라,
나를 중심으로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조금씩 자라났다.
정리된 구조물들의 잔해는
섬의 가장자리,
내가 다시는 돌아보지 않을 곳에
조용히 쌓아두었다.
그것들은 여전히
무게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 그 무게는
나를 짓누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딛고 선 삶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시선을 주었다.
안녕이라고,
고마웠다고,
이제 보내주겠다고.
그러고는 정리된 빈터로
되돌아왔다.
그 자리는 텅 비어 있었지만,
그 속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잠들어 있었다.
무엇을 심을까,
어떤 빛으로 채워나갈까.
상상에 상상을 더하자,
심장의 박동이 그 상상에 맞춰
조금씩 빨라졌다.
나는 작은 정원을 넘어서,
이 숲 전체를,
그리고 이 섬 전체를
나만의 살아있는 공간으로
바꾸어갈 상상을 시작했다.
나의 이야기,
나의 감정,
나의 결이 살아 숨 쉬는 공간으로.
이제 나의 정원은
섬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의 내면 깊은 곳에도 있었다.
한 그루씩,
한 자리씩,
정성스럽고 조용하게.
돌봄과 성장,
치유를 넘어,
나는 지금 새로운 생명을 준비하고 있었다.
내가 걷고 있는 이 여정은,
그 모든 시간을 품은
단단한 삶의 기반이
되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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