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손에 쥔 것들의 유통기한을 어렴풋이 알고 산다.
음식의 포장지에 적힌 날짜처럼 정확히 적혀 있진 않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어떤 것이 얼마나 오래 머무를 수 있을지, 혹은 어느 순간 불쑥 끝나버릴지를 느끼곤 한다.

유통기한은 언제나 끝을 전제로 한다.
한때는 그 사실이 서늘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이를 조금씩 먹으며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모든 것에 유통기한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을 더 깊이 바라보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통기한이 없는 감정은 없다.
사랑도, 미움도, 서운함도, 기대도.
그 중 어떤 감정은 너무 빨리 상해버리고,
어떤 감정은 생각보다 오래 버티며 남는다.
그리고 어떤 감정은 분명 끝난 줄 알았는데,
서랍 깊은 곳에서 오래된 과자처럼 뜻밖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나는 언젠가 냉장고를 정리하다가 유통기한이 몇 달이나 지나버린 음료수를 발견한 적이 있다.
버려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한참 동안 손에 들고만 있었다.
그 음료를 처음 사던 날의 기분, 함께 있던 사람, 그때의 공기까지도 생각났기 때문이다.
유통기한이 지난 것은 단순히 상한 것이 아니라,
한때의 시간과 감정이 닿아 있던 작은 조각이라는 사실을 그 순간 조금 알게 되었다.

사람 사이에도 그런 순간이 있다.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사이, 관계는 모양을 잃는다.
예전처럼 따뜻한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예전처럼 서로에게 자연스럽게 기대지도 못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시간이 헛된 것은 아니다.
지난 관계는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의 나를 완성시킨 하나의 층으로 남아 있는다.

나는 오래전부터 이 생각을 해왔다.
유통기한은 ‘끝’이 아니라 ‘온도’에 가깝다고.
무언가가 상해버리는 때는 보통 너무 차갑거나, 너무 뜨겁거나, 제대로 돌보지 못했을 때다.
반대로 적당한 온도로 잘 지켜준 것들은 오래도록 제 맛과 빛을 잃지 않는다.
감정도, 사람도, 관계도, 마음도 그렇다.

사람은 종종 어떤 감정이 오래갈 거라 믿는다.
특히 행복과 기대는 그렇다.
하지만 유통기한이 끝났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된 건 아니다.
모든 감정은 그 순간에 충실했기 때문에 값지다.
그 순간을 통과한 나는 그 전보다 조금 더 깊어져 있을 테니까.

나는 인생의 유통기한을 생각할 때마다 2가지가 떠오른다.
덧없기 때문에 섬세하고, 정이 있기 때문에 따뜻하다.
두 감성은 서로 어긋나는 것 같으면서도, 결국 같은 곳을 가리킨다.
‘언젠가 끝날 것이기에 지금 온전하다.’

유통기한이 있는 것은 아름답다.
그 끝을 아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제대로 붙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예전처럼 무언가의 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관계가 변해가는 과정에도, 마음이 서서히 식어가는 순간에도,
그 안에 담긴 시간의 층과 온기를 조금 더 차분히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솔직해지고, 더 부드러워지고,
더 정확한 온도로 사람을 대하려 노력하게 되었다.

우리 모두가 가진 것들의 유통기한은 서로 다르고,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하나만은 확실하다.
유통기한이 있다고 해서 가치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 유한함이 지금 이 순간을 더 깊게 만들어 준다는 것.

나는 오늘도 마음속의 선반을 열어본다.
그 안에는 이제 끝난 것들도 있고, 여전히 따뜻한 것들도 있으며,
아직 개봉조차 하지 않은 마음의 상자들도, 상처 받아서 다시 봉해둔 상자들도 있다.
그 모든 것이 나를 이루는 시간들이고,
그 모든 것이 한때의 나를 살게 했던 감정들이다.

어쩌면 유통기한이 있다는 것은 끝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더 사랑하라’ 라는 말의 다른 표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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