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밑으로 익숙해진 흙의 서걱거림과 크고 작은 돌멩이들의 단단한 감촉이 번갈아 전해졌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나는 말없이, 그러나 분명한 의지를 품은 채 걷고 있었다.
동굴 안의 축축하고 끈적한 어둠을 빠져나온 뒤 마주한 섬의 공기는
여전히 낯설었고, 예측할 수 없었지만
예전처럼 살갗을 긴장시키고 폐를 조이는 불안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어디서부터 인가 부는 바람이
온몸에 잔잔하게 스며들었고,
그 속에는 익숙지 않은 생생함과,
어디선가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기운 같은 것이 깃들어 있었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가 조용히 다가왔다.
한때는 슬픔의 노래 같았고,
때로는 후회의 속삭임처럼 느껴졌던 그 소리는
이제는 그저 바람 소리였다.
설명도, 해석도 필요 없는,
섬이 숨을 쉬는 자연스러운 호흡처럼.
멀리서 들려오는 희미한 파도 소리,
나뭇가지가 가볍게 흔들리는 소리,
바위틈 사이를 지나는 작은 생명체들의 조심스러운 발소리들.
그 어떤 것도 나를 향해 말을 걸지 않았다.
이제는 그저 ‘존재하는 소리들’이었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그저 거기 있는 것들.
자기 자리에 머물며 자기의 리듬대로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의 숨결처럼 느껴졌다.
얼마나 걸었을까.
시간이 흘러가는 속도는 가늠할 수 없었지만
섬의 풍경은 아주 천천히,
거의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세하게 변해 있었다.
한때 나를 위협하듯 서 있던 기괴한 나무들은
여전히 비틀린 몸체를 드러낸 채 그 자리에 서 있었지만,
그 뒤틀림 속에서 나는 이제
절망보다는 인내를,
파괴보다는 생존을 읽을 수 있었다.
앙상한 가지들이 더 이상 고통의 상징으로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긴 시간 동안 바람과 비를 견디며 버텨온 흔적,
그들이 살아남은 방식,
말없이 시간과 싸워온 몸의 기록 같았다.
멀리서 폭포 소리가 들려왔다.
예전에는 너무도 거대해서 나를 삼킬 듯 으르렁거리던 그 소리가
이제는 더 이상 위협이 아니었다.
섬의 심장처럼,
묵직하지만 안정된 울림으로 배경을 채우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말이 없었고,
그저 천천히 발밑을 살피며,
가끔씩 주변의 풍경을 가만히 응시하며 걸음을 옮겼다.
조심스럽지만 두렵지 않은 걸음.
침묵 속에 있었지만,
그 안에서 자라나는 어떤 확신과 함께였다.
마침내, 익숙하면서도 어쩐지 완전히 달라진 어떤 장소에 다다랐다.
이곳은 내가 섬에 처음 도착한 후, 절망의 가장 밑바닥에서 아주 희미한 가능성을 붙잡았던 그 자리였다.
그 가능성을 믿고, 마른 흙은 손으로 부드럽게 고르고, 작은 돌멩이들을 하나씩 치워가며
용서와 이해, 사랑과 연민이라는 이름의 아주 작은 씨앗들을 심었던 바로 그곳.
주변은 여전히 척박했다.
마른바람이 불어와 흙먼지가 희미하게 일었고, 낯선 풀벌레 소리가 낮게 깔려 있었으며,
발밑의 흙은 여전히 거칠고 단단했다.
하지만 내가 손으로 눌러 다졌던 흔적들,
잡초를 뽑고 가만히 숨을 고르며 땅을 어루만졌던 기억들이
어렴풋한 자국으로 남아,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숨이 멎을 듯했고, 심장은 이유도 모른 채 빠르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고개를 숙여 땅을 바라보자,
믿기 어려운 작은 기적이 바로 눈앞에,
이 황량한 땅 위에서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펼쳐져 있었다.
내가 심었던 그 작은 씨앗들이,
이렇게나 메마르고 거칠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던 절망의 땅 위에서
어떻게든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온 힘을 다해,
마치 살아야만 한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땅을 움켜쥔 듯이.
예전에는 눈을 가까이 들이대고, 빛의 각도로 바꿔가며 겨우 확인할 수 있었던
아주 가느다란 실금 같은 싹들이었는데-
지금은 달랐다.
여전히 크지 않았지만,
그 존재는 분명하고 또렷했다.
가느다란 줄기는 어느새 조금 더 단단해져 있었고,
반쯤 투명했던 잎사귀는 짙고 또렷한 녹색을 띠며
햇살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그 잎 하나하나가 작은 깃발처럼 흔들리며
“나 여기 있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싹은 고개를 위로 들고 있었고,
어떤 싹은 아주 낮게 몸을 웅크리듯 엎드려 있었다.
그러나 그 자세와 상관없이
모두가, 이 섬 위에 ‘존재’하고 있었다.
스스로 선택한 듯, 스스로 견디는 듯,
이토록 조용하고 단호한 생명력을 품고.
그들은 여전히 연약하고 작았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분명한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죽어 있던 땅 위에,
하나둘 초록빛 점이 박히듯 돋아나
이 메마른 풍경 속에
아주 작고 미약하지만 확실한 ‘살아 있음’의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선 채,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초록의 점들,
작은 잎사귀들과 굽은 줄기들,
그 모든 존재가
마치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내게
“여기가 네 시작점이야”라고,
말없이 속삭이는 듯 보였다.
작고 조용한 별들처럼.
한때 불모의 절망이었던 땅 위에
이제는 작은 우주가 피어나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마치 금방이라도 부서져버릴 유리병을 다루듯
그 작은 생명들 곁에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손바닥에 닿은 땅은 차갑고 거칠었다.
마른 흙 입자들이 손가락 사이로 스며들었고,
무릎 밑으로는 울퉁불퉁한 돌의 감촉이 그대로 전해졌다.
그 불편한 감각조차
지금 이 순간만큼은 경건하게 느껴졌다.
나는 떨림 없는 손을 조심스럽게 뻗어
가장 가까이에 있던 작은 싹의 여린 줄기를
살며시, 정말 아주 살며시 만져보았다.
손끝에 닿는 감촉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 온기.
그 조그맣고 연약한 존재에서 전해지는 생명의 온기가
내 손끝에서 시작되어 팔을 타고 올라오고,
가슴을 지나 마음 깊은 곳까지 잔잔하게 퍼져나갔다.
그것은 내가 이 섬에 온 이후,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잊고 있었던 어떤 감정이었다.
두려움도, 고통도, 외로움도 아닌-
그 무엇과도 다른, 아주 순수하고 다정한 따뜻함.
살아있는 존재가 가진 온기.
희망이 가진 온기.
나는 손끝으로, 손바닥으로
그 작은 생명들을 하나하나 천천히 만져보았다.
숨을 죽이고, 숨을 고르며.
그들 몸에 남아 있는 작은 흠집과 뒤틀림,
바람에 시달린 흔적, 뿌리의 방향까지
그 모든 것들이 생존의 증거처럼 느껴졌다.
부러움도 동정도 아닌,
존경에 가까운 감정이 가슴 안에서 조용히 피어올랐다.
주변을 둘러보니,
여전히 자라나는 싹들 사이사이에
날카로운 조약돌들이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었고
부러진 가지들이 엉켜 있었다.
땅은 말라붙어 딱딱했고, 그 틈을 비집고 올라온 생명들은
기적처럼 여겨졌다.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이 작은 생명들이 조금이라도 더 숨 쉬기 편하도록,
햇살을 더 깊게 받아들이고
뿌리를 더 멀리 뻗을 수 있도록.
가만히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그러나 단단한 의지로 돌멩이들을 하나씩 치워냈다.
손바닥이 긁히고, 손톱에 흙이 끼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부러진 가지들을 들어내며
그늘을 없애고, 바람길을 열어주었다.
단단하게 굳은 흙은 손가락으로 눌러 부드럽게 부쉈고,
작은 손바닥으로 땅을 쓸어 정리해 나갔다.
이 모든 움직임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나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었고,
누군가에게 이해를 구할 수도 없었지만-
그저 이 작은 생명들을 보살피고 싶었다.
그들이 조금이라도 더 편히 자랄 수 있도록
그들을 둘러싼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그 작은 존재들이
이토록 거칠고 아무도 돌보지 않는 땅에서
기어코 자라났다는 사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이곳이 버려진 땅이 아니라는 증거가 되었고,
내가 그들과 함께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되었다.
그들은 존재는
내게 묻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존재함으로써 말하고 있었다.
살아 있으라고.
희망을 버리지 말라고.
그리고-
다시 시작하라고.
자라난 싹들을 돌보고,
주변의 돌멩이와 마른 가지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무심코 고개를 들었을 때,
해는 어느새 수평선 가까이 기울어 있었고
섬의 풍경은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붉은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붉은 햇살은 하늘 가장자리를 부드럽게 물들이고,
빛은 나뭇잎의 결 사이로 스며들었으며
바위 위에도 얇은 막처럼 번져 있었다.
세상이 느릿하게 숨을 고르는 듯한 저녁의 기운.
나는 작은 싹들 곁에 다시 조용히 앉았다.
아무 말 없이.
그저 한참 동안,
그들의 존재를, 움직임을, 고요히 바라보았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여린 줄기들이 아주 살짝 흔들렸다.
금방이라도 꺾일 듯 가늘고 불안정한 모습이었지만
그 속엔 알 수 없는 강인함이 있었다.
빛을 받은 잎사귀들이
반짝이며 미세하게 떨릴 때-
나는 그것이 단지 식물의 반응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것의 언어처럼 느껴졌다.
그토록 작은 생명들이
이 척박한 땅 위에서
그 어떤 보호도 없이, 아무의 시선도 닿지 않은 채
제자리에서 꿋꿋이 숨을 쉬고 있었다.
그 모습은 애처롭기보다
오히려 경이로웠다.
세상의 무관심,
무수한 시간의 냉혹함,
혹독한 바람과 뜨거운 햇살,
그 모든 것을 받아내고도
부서지지 않고 자라난 생명력.
나는 그것을 단지 ‘식물의 끈질김’이라고 부르기 어려웠다.
그건 살아 있으려는 모든 존재의 본능이자,
한 번 뿌리내린 곳에서 생을 이어가고자 하는
의지의 형상이었다.
그리고 문득-
나는 나 자신도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 또한
이 외딴 섬에서, 절망 속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던 땅 위에서
기어코 살아남았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혼자 울고, 스스로를 다시 일으켜 세우며
조용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
그건 아주 단단한,
그러나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실감으로 가슴에 남았다.
그들을 지켜보다가-
문득, 마음 깊은 곳에서 조용하지만 강한 충동이 일었다.
이 작은 공간.
나의 희망이 움튼,
메마른 땅 위에서 처음으로 ‘살아 있음’을 느낀 이 자리.
나는 이곳을 조금 더 안전하고 온전한 곳으로 만들고 싶어졌다.
작은 싹들이 더 이상 거친 바람이나 갑작스러운 위험에 노출되지 않도록.
그리고 나 자신도,
이곳에 있을 때만큼은
비로소 편히 숨 쉴 수 있기를 바라며.
나는 일어섰다.
주변에 흩어진 바위와 돌멩이들을 하나하나 손에 들고 모았다.
작고 크고, 울퉁불퉁하고 매끈한 것들을 가리지 않고 천천히 쌓아 올렸다.
이전에 한 번 시도했던 일이지만,
이번에는 마음가짐이 완전히 달랐다.
돌을 들고 놓는 단순한 행동이
이상하리만치 의미 있게 느껴졌다.
손끝에 느껴지는 거칠고 차가운 감촉조차도
지금은 어떤 의식처럼,
묵직한 다짐처럼 마음에 새겨졌다.
하나씩 올릴 때마다
이 돌담은 단지 물리적인 경계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 만들어가는 작은 세계의 테두리처럼 느껴졌다.
높지는 않았지만,
이 담장은 분명히 공간을 나눴다.
바깥의 무정함과
안쪽의 작은 새싹을.
그리고 나는 담장 안쪽의 땅을 손으로 부드럽게 다듬었다.
단단하게 굳어 있던 흙을 천천히 풀고,
자잘한 돌멩이들을 옆으로 밀어내며
좁지만 분명한 작은 길을 만들었다.
그 길은 나 자신을 위한 통로였다.
정원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길,
그리고 이 공간에서 숨을 고르고
다시 세상 밖으로 나아갈 수 있는
나만의 출구.
돌담을 마저 쌓고, 길의 끝자락까지 손질을 마쳤을 때-
나는 이 작은 공간이 더 이상 단순한 ‘섬의 한 구석’이 아님을 분명히 느꼈다.
여기는 이제,
내가 직접 손으로 빚은 나만의 세계였다.
수많은 고통의 시간과
버티고 견딘 날들이
이 공간의 흙에, 바위에, 그리고 그 싹들의 줄기에 스며 있었고,
그 모든 것을 품고 있는 이 자리는
고통으로만 이루어진 장소가 아니라
희망이 처음 피어난 땅이 되었고,
내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점이 되었다.
내 안의 아픔과 두려움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그것은 더 이상 나를 주저앉히는 짐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정원을 지키고 싶은 마음,
작은 생명들을 돌보고 싶은 마음,
그리고 이 안에서 나 자신을 온전히 보호하고 싶은 마음의
가장 깊은 원천이 되어주었다.
나는 깨달았다.
이 돌담을 쌓고,
이 작은 길을 다듬는 모든 움직임이-
결국 나 자신을 돌보는 일이었다는 것을.
내 안의 황폐했던 땅에도
이처럼 생명이 자랄 수 있다는 것.
경계를 만들 수 있다는 것.
그 위에서 다시 나만의 길을 만들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건,
내 속도대로, 나의 방식으로,
충분히 가능하다는 사실을.
어둠이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섬의 공기 속에는 낮의 열기와 함께
조용한 저녁의 냄새가 스며들었다.
나는 돌담 안에 심고 돌봐온 작은 생명들을 마지막으로 바라보았다.
해가 완전히 저물지는 않았지만,
빛은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나 빛이 줄어들어도
그들 하나하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살아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어렴풋하게 느껴지는 줄기의 윤곽,
살짝 흔들리는 잎의 실루엣.
그 희미한 흔들림조차도
묵직한 존재감처럼 느껴졌다.
나는 조용히 숨을 들이쉬었다.
이 척박한 섬에서,
이 돌밭과 마른 흙 위에,
내가 직접 심고 손으로 다듬으며
매일의 아픔 속에서 돌본 생명들이
이토록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
그것이 나에게 말했다.
이 모든 고난을 지나
막다른 동굴의 끝자락에서 돌아온 나 자신 또한-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
단순한 기대가 아니었다.
언젠가 피어날지 모를 막연한 희망도 아니었다.
그건 지금,
내 안에 조용히,
하지만 분명하게 살아 있는 ‘확신’이었다.
불씨처럼,
쉽게 꺼지지 않고 안에서 계속 타오르는.
혹은
땅 깊숙이 뿌리내린 씨앗처럼,
조용하지만 절대 뽑히지 않을 단단함으로 존재하는.
나는 천천히 일어섰다.
이 작은 정원.
돌담 안의 이 땅은 이제 단순한 땅이 아니었다.
나의 새로운 시작.
나의 회복이 시작되는 자리.
무너진 나를 다시 쌓아 올릴,
가장 중요한 기반이었다/
나는 그곳을 돌아보며
내일 다시 올 것을,
그리고 이 작은 생명들과 함께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성장해 나갈 것을
속으로 조용히 약속했다.
발걸음을 돌렸다.
어둠은 이미 완연히 내리고 있었지만,
내 발걸음은 가벼웠다.
그건 더 이상 도망치는 걸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돌아오는 중이었다.
나 자신에게로.
그리고 내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삶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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