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갈수록, 나무들은 자신이 지닌 색을 조금씩 꺼내어 보여준다.
여름 내내 숨죽이고 있던 잎들은 어느 순간 단번에 물드는 것이 아니라,
아주 조심스럽게, 마치 마음의 결을 정리하듯 색을 바꿔간다.
붉음과 노랑 사이 어딘가에서 망설이다가, 바람이 한 번 스쳐가면 비로소 결심한듯 농도를 더한다.
그래서 단풍은 순간의 장식이 아니라, 오랜 시간 품어온 마음의 결과처럼 느껴진다.
나는 때때로 단풍을 바라보며, 사람이 한 계절을 건너는 모습도 이와 비슷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급격히 변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보이지 않는 속에서 천천히 쌓인 감정과 생각들이 빛으로 드러나는 순간일 뿐이다.
어느 날 문득, ‘아, 내가 이렇게 달라졌구나’하고 깨닫게 되는 순간처럼.
단풍도 그렇게, 천천히 준비해온 끝에 드러난 색이다.
가장 깊은 붉음은 한 번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한낮의 강한 빛과 차가운 새벽 안개를 지나며 차곡차곡 쌓인 시간, 바람의 상처, 비의 흔적, 햇살의 따뜻함이 겹겹이 스며든 끝에 비로소 도달한 빛이다.
그래서인지 단풍의 색은 결코 단순한 색이 아니다.
그 안에는 계절의 온도와 시간의 밀도, 잎 하나가 지나온 모든 날들이 숨어 있다.
사람 마음도 그렇지 않은가.
가볍게 말하는 한 문장 속에, 이름 붙일 수 없는 수많은 감정의 층의가 겹쳐 있다.
가을 산책길에서 바람에 흩날리는 단풍을 보면, 아름답다는 감탄과 함께 왠지 모를 쓸쓸함이 스친다.
아름다움과 쓸쓸함이 동시에 찾아오는 계절은 흔치 않다.
하지만 그것은 사라짐을 앞두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여기까지 잘 버텼다’는 위로가 함께 섞여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색을 다해 빛나려는 잎들을 보면, 누구든 지나온 계절을 견뎌낸 자신을 떠올릴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바람이 세차게 불어 단풍이 한꺼번에 떨어지는 날이면, 나는 조금 더 오래 발걸음을 멈춘다.
잎이 떨어지는 소리는 아주 작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에 크게 남는다.
‘끝’이라는 말보다 ‘넘겨짐’이라는 느낌이 더 가까운 순간.
잎은 나무에서 떨어져도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흙의 이름으로 돌아가 다음 계절을 준비한다.
그러니 떨어진다는 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순환을 위한 이동일 뿐이다.
이 사실을 알고 나면, 단풍은 더 이상 시들어가는 상징이 아니라, 다음을 위한 자리 내어주기처럼 보인다.
떠나야 할 때를 알아채고, 자기의 역할이 끝났음을 받아들이며, 조용히 다음 생명을 위해 땅으로 내려가는 모습.
어쩌면 이것이 자연이 보여주는 용기일지도 모른다.
사람의 관계도, 마음의 변화도, 꿈의 무늬도 이와 닮아 있다.
우리는 어떤 계절에서는 빛나고, 어떤 계절에서는 쉼의 시간을 갖는다.
때로는 나도 모르게 색이 바래고, 때로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선명해진다.
그 모든 변화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걸, 단풍은 매년 반복해서 알려준다.
‘너도 너의 색으로 충분하고, 달라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단풍이 가장 아름다운 시기는 어쩌면, 색이 절정에 이른 때가 아니라 바람을 타고 흩날리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마지막까지 스스로의 색을 놓지 않고, 그 색을 세상에 흩뿌리며 사라지는 모습은 어떤 말보다 깊은 장면을 남긴다.
마치 우리도 삶의 여러 순간에, 누군가의 기억 속에 작은 색 하나 남겨두는 것처럼.
가을이 지나면 단풍은 보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잎이 남긴 색은 마음속 어딘가에 오래도록 머물며 다음 계절을 기다린다.
사람 사이의 온기나 말 한마디처럼, 겉으로는 사라진 듯 보이지만 실은 더 깊게 스며드는 것들이 있다.
그래서일까.
나는 단풍을 보면 늘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진다.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곳으로 옮겨지는 것이라는 사실이 위로처럼 느껴진다.
계절의 끝에서야 찾아오는 이 작은 위로가, 매해 가을을 기다리게 만드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올해도, 나무들은 자기 속도로, 자기만의 방식으로 색을 채워가고 있다.
어떤 잎은 서둘러 붉어지고, 어떤 잎은 마지막까지 초록을 붙잡고 있다가 천천히 물들고 있는 중이다.
그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누구도 그들의 속도를 재촉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결국 모두가 자기 때에 빛난다는 걸 자연은 알고 있다.
나 역시 그 사실을 기억하며 한 계절을 건넌다.
지금의 나는 아직 초록빛일 수도 있고, 이미 붉게 물든 상태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그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단풍의 색이 모두 다르듯, 사람의 속도도 다를 뿐이다.
우리는 각자의 시간 속에서 조금씩 물들고, 조금씩 변하면, 결국은 자신만의 색에 도달한다.
가을이 깊어질수록 단풍은 계속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떨어진 단풍 아래에서 다음 해의 꽃눈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 계절을 슬픔으로만 보지 않는다.
어쩌면 단풍이 가르치는 가장 조용한 지혜일지도.
‘끝나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새로운 시작은 함께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단풍은 올해도 말없이 우리에게
‘당신도 지금의 계절을 잘 건너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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